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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로 살펴본 “보고서 쓸 때 지켜야 할 문장의 원칙”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0. 27. 20:28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지식이라도 나눔의 차원에서 공유합니다. 밑에 언급한 원칙들은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지만, 이런 원칙을 비틀어서 가지고 놀 수 있는 대가라거나 원칙을 깨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지키는 편이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자세한 여러 원칙들이 있겠지만, 제가 일하면서 깨달은 몇 가지 핵심만 적어 봅니다.


경고: 극악의 장문입니다.


글쓰기에 관한 좋은 내용들이 어제부터 타임라인에 올라오고 있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먹고 사는 일에 글을 쓰는 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미학적이 아닌- 기능적 글쓰기에 대해 몇 자 적어 놓은 두 개의 글을 붙여서 올린다. 글을 쓰는 게 직업이 아닌 사람들이 회사 일의 일부로 보고서를 쓸 때 지켜야 할 원칙이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기자, 작가들이 보기에는 우스운 수준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회사 생활하는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며, 올해 초던가 작년 말에 페북 타임라인에 써서 소수의 지인들과 공유했던 두 개의 글을 이어 붙인다. 이번에도, 누군가 알려준 바도 없이 홀로 길 바닥에서 몸으로 익힌 내용이라 이론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나도 일할 때만 지키지, 페북에서 노닥 거릴 때는 몸에 배어있지도 않은 원칙들이라 귀찮아서 안 지킨다.


 


1. 들어가며


김훈씨가 보수주의자인데, 그 반대편을 이해하고 싶어하며 기자 말년에 잠시 한겨레에서 기자를 한다. 물론 그 동거는 오래 가지 않았고, DJ가 당선되자 한겨레에서 싣기 어려운 글을 쓰고 사직하고 소설가의 길을 간다.


수십년의 기자 시절에도 그가 쓴 미문은 이름이 높았고 -오죽 잘 썼으면, 나는 그가 쉰에 가까운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90년대 기자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수식을 배제한 간결하게 주어 술어로만 된 문장을 구사하는 그의 문장은 기사를 넘어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물론 회사 생활에서 보고서를 쓸 때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만, 그 명확한 전달 방식은 분명 도움이 된다.


 


2. 예시


아래의 문장은 그가 한겨레 기자 시절 쓴 기사이고, 그 아래에 있는 것은 그의 두 번째 장편(세번째던가?) <칼의 노래>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왜 이 문장이 잘 쓴 문장인지를 한 번 미리 추론해 보기를 바란다.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군량미가 동나서 군사들을 먹이지 못하고 적군의 군량미는 쌓여 가는 상황 – 글쓴이 주)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중략)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어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중략)


……………… 짠지를 씹던 송여종이 말했다. “겨울이 빨리 가야 할 터인데요.” 그 말은 밥을 넘기기가 민망한 자의 무의미한 소리처럼 들렸다. “겨울이 빠르거나 더딜 리가 있겠느냐?” 나는 송여종처럼 무의미한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말했다. “보리알이 덜 물렀다. 잘 씹어 먹어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의 밥은 무참했다. 끼니는 계속 돌아왔고 나는 먹었다.


개인적으로 칼의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십자가를 본 이순신을 묘사한 대목인데, 이는 언제 다시 쓸 것이다. 이 글의 그 훌륭함이야 보는 사람이 저마다 느끼면 될 것이다.


 


3. 위 문장의 훌륭한 점


잠시 몇 자 옮겨쓴 김에 written communication에서 주의할 점 두 가지를 살펴 본다. (이는 스티븐 킹이나 다른 작법 책에서 역시 언급하는 바이다.)


 


3.1. 부사(영어로 ly가 붙는 부사)를 쓰지 말아라.


김훈씨 문장에서 부사는 없다. 먼저 인용한 기사에서 부사는 마지막 줄에 나온 ‘아마도’ 정도이고, 두번째 글에서는 ‘덜'(여물었다)와 ‘잘'(씹어 먹어라) 정도가 눈에 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지옥 길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


부사만 덜어내도 당신의 장표와 보고서는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부사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사를 쓰는 이유는 객관적인 사실을 진술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글이 문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토대가 되는 일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에 부사로 얼버무리려고 한다.


70%인지 80%인지를 모르고 일주일에 3번인지 4번인지를 모르니, ‘대체로’ ‘일반적으로’ ‘다소’ ‘흔히’ ‘상당히”빈번히’를 사용한다. 그리고, 증가했다/감소했다라는 동사를 쓸 만큼 확실한 data로 경향성을 발견하지 못해서 자신이 없으니 여지를 남겨두는 부사를 집어 넣어서 내용을 흐리거나 도망갈 구석을 만든다. 그래서, 도망갈 구석으로 얼버무리는 부사로 뒤덮인 글을 보다 보면 결과적으로 얼버무리는 내용으로 가득 차서 도무지 원래 하려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알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부사란 근거 없이 수식해주는 말이다. 근거가 있으면 부사를 안 써도 된다.


나는 일로 하는 장표에서는 이 원칙을 지킨다. 부사를 극단적으로 쓰지 않고 숫자와 명사/동사로 묘사하고자 한다.


– 이전 글과 함께 엮어서 이야기하자면, 주니어들이 하는 대표적인 실수다.


 


3.2. 수동태(or 피동형) 문장은 사용하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수동태를 사립 고등학교의 겉늙은이 같은 녀석들의 문장이라고 칭한다. 장표에서 수동태 또는 피동형의 문장은 어떤 경우에 쓰이는가? 그 목적은 뻔하다. 수동태는 객관적인 척 하면서 도망가는 문장이다.


이것은 명확한 written communication을 방해하는 문장이다. 위의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 김훈씨 문장 중에는 그런 문장이 없다. 수동태는 안전하게 거리를 두는 문장이고 자신감이 결여되고, 객관적인 척 하는 문장이다.


‘증가하는 경향이 발견됨’고 쓰지 말고 ‘증가함’ 이라고 쓰고, “Workshop은 1월 30일 날 개최될 예정이며”라고 쓰지 말고, “워크샵은 1월 30일”이라고 써라. 종이는 못 아껴도 잉크는 아낄 수 있고, 그 보다 더 큰 장점은 읽거나 듣는 사람이 알아 듣기 쉽다. 수동태로 객관적인척 샌님인척 하느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문장을 쓰게 된다.


스티븐 킹의 수동태에 대한 사례 하나 더. “나의 첫 키스는 셰이나와 나의 사랑이 시작된 계기로서 나에게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 문장에 대해 스티븐 킹은 이게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인가?라고 하며, “세이나와 나의 사랑은 첫 키스로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을 잊을 수 없다.”라고 고치고 속이 후련해 한다. 첫 문장처럼 써놓고, 다른 사람이 못 알아 듣는다거나 지루해한다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존 스타인벡도 그러하고, 김훈씨도 그러했듯이 대부분의 대가들의 문장은 이 두 가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거나, 이 두 가지 원칙을 넘어서서 이 두 가지 원칙을 일부러 어기며 농락한다. 장담컨대, 당신이 만든 장표에서 이 두 가지만 없애도 당신의 장표, 보고서는 이전 보다 나아질 것이다.


 


3.3. 묘사하는 문장을 써라


추가하여 몇 자 더 써본다. 이것은 스티븐 킹을 빌리지 않은 내 생각이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에서는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설명(explain)하는 문장을 쓰지 말고, 묘사(describe)하는 문장을 써라. 위에서 김훈씨의 첫 글에서 앞의 약 70%까지는 설명하는 문장이 단 한 문장도 나오지 않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까지는 모조리 묘사이다.


위의 두번째 글인 소설 [칼의 노래]를 보자. “민망한 자의 무의미한 소리처럼 들렸다.”와 앞부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묘사하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묘사하는 문장과 설명하는 문장을 나는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나는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관련 지식도 없이, 컨설팅을 하면서 장표를 만들고 문장을 쓰면서 내 스스로 이처럼 정의하고 그것을 원칙 삼아 일을 해왔다.)


묘사의 문장은 인간의 감각기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내용을 쓴 문장이고, 설명의 문장은 눈, 귀, 코를 이용하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들어가야 알 수 있는 내용을 쓴 문장이라고 구분한다.


 


3.3.1 묘사가 설명 보다 좋은 문장인 이유: 묘사가 설명보다 구체적이어서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편하다.


‘김씨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색깔을 보면서…’ 라고 쓰지 말고, “김씨는 녹색을 보면서…”라고 써라. 파워포인트 장표에서는 왼쪽에는 묘사를 오른쪽에는 설명의 문장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뒤셀도르프라고 부르는 삼각형이 주로 있다.) 종종 이를 왼쪽에는 Fact(Data 또는 공통의 Voice) -> 이로부터 도출된 Implication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문장으로 따지자면 왼쪽에는 묘사의 문장 -> 오른쪽에는 설명의 문장이다. (fact로부터 추론되는 시사점은 설명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영역에 있어서 가장 최악의 문장은 묘사인 척 하는 설명 문장이다. 이를테면, “편의성이 두드러지는 굴곡”이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턱” “다른 장비들을 압도하는 크기” 따위는 써서는 안 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들은 묘사하는 문장을 쓰고 싶지만, 묘사의 문장을 쓰는 수고는 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문장이며, 묘사를 가장한 설명이다. “편의성”은 감각기로 파악되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들어가봐야 알 수 있다.


이보다는 “가장 자리를 반원 모양으로 깎은 굴곡”이나 “30도의 경사진” 이 나은 표현이다.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턱”이라고 쓰지 말고, “야구의 홈 베이스처럼 각진 턱”이라고 쓰고, 정 굳은 의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그의 굳은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례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덧붙이는 편이 낫다.


“압도하는 크기”라고 쓰지 말고, “4미터의 크기”라고 쓰던지 “일반 장비의 2개 높이”라고 써라. 정 압도하고 싶다면, 장표의 왼쪽에는 “일반 장비 2배의 높이인 4m”라고 쓰고, 우측에 implication으로 “외관의 크기의 차이로 인하여 위압감을 줄 우려가 있으며” 운운하는 편이 맛은 별로지만, 그럭저럭 먹을 수는 음식 정도로 살려내는 길이다. 그리고, 인물의 대화를 빌어 묘사인 척 하는 설명도 하지 말자. 장표에서는 “인터뷰”나 “VOC”라는 이름으로 Fact 인척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3.3.2. 묘사가 설명 보다 좋은 문장인 두번째 이유: 읽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지 않는 문장이기 때문


설명의 문장을 쓰는 필자는 스스로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설명의 문장이 이어지면 도무지 그 연결 고리가 파악이 되지 않아 개연성이 떨어진다. 즉, 구체적인 숫자나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없이 바로 결론으로 도약해 버린다.


위의 김훈씨 문장을 살펴보자. 전경들과 시위대와 기자의 밥 먹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읽는 사람은 스스로 그 묘사를 통해 나름의 시사점을 추론하고 예상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따라오는 설명은 읽는 사람이 그 현상의 묘사를 통해 모호한 형태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묘사가 극에 달하여 설명 없이도 그 묘사만으로 같은 감정이나 추론에 도달하게 한다면 그것이 궁극의 경지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참고 : 실제로 그런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감독 중에 스웨덴의 아끼 까우르스마끼나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는 대사가 없는 영화를 찍으므로 설명하지 않고 묘사만으로 모든 의미를 전달한다.


데이타만 충실히 나열해도 그 데이타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확히 전달된다면, 설명의 문장은 필요 없다. 가장 아름다운 논문이나 리포트는 그래프와 수식만 있는데, 그 의미가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전달되는 형태가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해본다. 다만, Data나 Fact를 그 정도로 다루는 경지에 이르긴 어렵고, 설명도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거나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그러나 항상 묘사가 더 좋은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잊지는 말았으면 한다.


 


3.4. 가능한 문장은 짧게 쓴다.


길게 늘여 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런 원칙을 말한다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짧게 쓰는 편이 좋다. 그 이유는 길게 쓰면 주술 호응 등 여러 문법적 실수할 확률이 높아지고 모호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원칙 또한 대가라면 지킬 필요는 없지만, 문장의 대가라면 회사에서 보고서 쓰고 있지는 않겠지. 이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쓰기 보다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쓴 글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통신 전문 학교를 나와서 무역 회사에서 모스 부호와 텔렉스를 치다가 회사가 망해가면서 시간이 남아돌게 되자 회사의 노트와 볼펜으로 소설을 써서 문학상을 수상하고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쓴 에세이들을 묶어서 [소설가의 각오]를 출간하였다. 이 가운데 20대 시절인 1970년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의 문체’라는 장의 일부를 옮겨 본다.


(전략)……나에게는 빈틈 없는 문체가 있었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거나 새삼스럽게 문장력을 터특하기 위해 공부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모르스 부호의 발신기나 텔렉스의 키를 두드리는 것이 통신사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일손이 모자라는 직장에 있었던 덕분에 글자수를 줄이기 위한 체크며, 암호문을 해독하고 짜맞추는 일도 했기 때문이다. 통신사의 문장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그 다음으로 간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틀을 넘어서는 내용이라면 마땅히 국제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 얘기해야 할 것이다. 길고 구질구질한 전문을 볼 때 마다, “왜 이렇게 아까운 짓을 하는 거지. 나중에 요금이 많이 나와서 당황해도 난 몰라.”라며 내심 혀를 찼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한 가지 문체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주저 없이, 다소 인색한 문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후략)


 


4. 다시 위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예시


김훈씨의 [칼의 노래]에서 조선 군사 5천명이 진주성에서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이 느꼈을 절망, 참담함, 슬픔을 써낸 대목이 있다. 이 대목에서 김훈 씨는 아주 짧고 간결한 설명이 아닌 묘사의 문장으로 돌파해낸다.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들음) 진주성에서 조선 군사 5천이 죽었다. 닭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여기서 밤/새/혼/자/앉/아/있/었/다/는 좋은 문장의 표본으로 삼을만 하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문장의 원칙들이 모두 다 담겨 있다. (혼자는 부사인데,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부사는 영어로 이야기하면 ly가 붙는 부사들을 의미한다. 영어로 이야기하면 I stayed up all night alone.) 으로 모든 규칙을 다 지키고있다.ly 부사가 없고, 능동형이며, 짧은 단문이고, 묘사의 문장이다. 그리고, 묘사만으로 이어진 짧은 문장들을 반복시켜 행간에서 그리고 밤새 잠들지 못하고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그가 느꼈을 있을 참담함을 더욱 독자 스스로 느끼게 한다.


 


5. 어휘를 고르는 방법


묘사의 문장을 쓰고 설명의 문장을 피하라는 원칙과 일맥 상통하는 내용을 문장이 아닌 단어의 단위에서 다루어 본다.


세상의 단어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는 사과(apple) 또는 신사(gentleman) 중에 하나다. 이 무슨 해괴한 구분이냐고 생각할 테니 조금 풀어서 설명해 본다.


사과에 속하는 단어들은 가치중립적인 단어들이다. 그래서, 이 단어들에는 앞에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썩은 사과, 신선한 사과, 떫은 사과, 맛있는 사과 등등.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과라는 단어가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능을 할 뿐 가치 평가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 유형인 신사를 보자. 신사는 사과와 마찬가지로 명사이지만 그 단어 자체에 이미 긍정적인 가치 평가를 담고 있다. 즉, 부정적인 수식어를 붙이면 그 사이에서 형용모순이 발생해 버리는 단어이다. 너절한 신사, 방탕한 신사, 불친절한 신사, 난잡한 신사 모두 신사라는 단어가 예정하고 있지 않다. 동사도 마찬가지로 “남발하다” “훼손하다”는 부정적 가치를 담고 있다. 물론 하나의 단어는 신사였다가 사과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18세기의 기차라는 단어는 신사였다. 최첨단 기술이 가지는 경외감을 담고 있었고 기계적 정확성을 의미했으나, 이제는 교통 수단의 하나로 사과가 되었다.


글쓰기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가능한 사과를 많이 쓰고 신사를 적게 써라. 예컨대 “20% 비싼 단가로 구매”라고 쓰지 말자. ‘비싼’은 신사다. 100원이 아닌 120원에 사더라도 더 좋은 품질, 더 빠른 배송이라는 장점이 있어서 value for price라는 측면에서는 비싸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이런 단어를 쓰면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설명하는 문장(다른 이의 마음을 읽은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이를 수정하면 “20% 높은 단가로 구매”가 묘사하는 문장이 된다.


신사인 단어는 정치적 연설이나 웅변에서는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윽박지르는 것처럼 보이고 양념을 많이 쳐서 원래 재료가 뭔지 모르는 음식처럼 변한다. 그러니, 사과 단어를 써서 원하는 메시지로 인도해라.


원문: darrel76님의 블로그

http://ppss.kr/archives/32393